[Book] 너무나 인간적인 고뇌 (칼의 노래)

칼의 노래, 김훈
나에게 이순신은 역사속 대단한 공적을 남긴 강인한 영웅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이순신은 전쟁 속에서 삶과 죽음을 고민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임금을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자신의 군사와 가족을 생각하는 한 인간의 나약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불리한 환경과 열악한 상황 속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그의 전술과 전략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나라와 임금, 하지만 임금의 시기와 간신들 때문에 적이 없으면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처지에서, 그리고 전쟁 속에서,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음을 매 순간 고뇌한다.
그리고 삶 속에서 치열하게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고 하고, 전쟁의 전략을 짜며 자신의 군사를 훈련시키는 강인한 면모를 보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적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며 왜 그들이 그의 적인지를 고뇌하고, 아들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너지고, 전쟁을 치루며 남은 통증과 아픔을 겨우 견뎌내는 모습은 영웅이기 이전에 그도 한 인간으로서 두려움과 외로움을 홀로 맞서고 있었다는 생각에 가엾게 여겨졌다.
임금과 적 사이에서 그는 자연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적에게 죽거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임금에게 죽거나. 전쟁 속에서 죽는 것이 그가 자연사라고 여겼던 것이, 나라를 위해 업적을 세우고도 그에 따른 영화보다는 죽음을 먼저 예견하는 이순신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와 책을 내려놓고 내내 공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이순신에 대한 대단함은 이 책을 읽으며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영웅이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고뇌를 여지없이 느낄 수 있었다. 싸우기 위해 바다의 물길과 바람을 읽어내고 전술을 펼치는, 동시에 백성과 부하 그리고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헤아리는 그의 고뇌를.. 그리고 김훈 작가의 글은 그것을 더욱 배가 시켜줬다. 한 문장 한 문장 표현이 아름다워 놓칠까 꾹꾹 눌러 담으며 읽은 책이다.
밑줄 그으며 읽은 구절들..
칼의 울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 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적의 적의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안개 속의 살구꽃
포구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물길을 따라 물러설 자리가 없는 포구야말로 가장 위태로운 숙영지였다.
내가 원균에게 인계한 병력과 장비는 한산 통제영에서 삼 년 반 동안 확보한 군비의 전체였으며, 조선 수군 총 군비의 팔할이 넘는 것이었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나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나의 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생애에서 끝날 것이었다.
서울에는 봄비가 내렸고 한강 밤섬에는 안개 속에서 살구꽃이 피어 있었다.
다시 세상 속으로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를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몸이 살아서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식은땀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적의 기척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일자진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 길이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구덩이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며 무녀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내 안의 죽음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혼자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둘 곳 없었다.
생선, 배, 무기, 연장
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명량의 역류를 거슬러 나아갈 때도, 배를 띄워주는 것은 물이었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도 물이었다. 생선의 지느러미가 물살의 힘과 각도를 감지하듯이 노를 잡은 격군들의 팔이 물살의 힘과 속도와 방향을 감지한다. 장수의 몸이 격군의 몸을 느끼고, 노 잡은 격군의 몸이 물을 느껴서, 배는 사람의 몸의 일부로써 역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배는 생선과도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속을 긁어서 밀쳐내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물이 밀어주어야만 물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가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무거운 몸
상처가 아물어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아픔이 살아 있는 몸속에 박혀 있었으나 병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병은 아득한 적과도 같았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물들이기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수와 공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국물
전쟁은 천천히 죽어가는 말기 암과 같았다. 적이 죽어가는 것인지 내가 죽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송장 더미 옆에서도 백성들의 오일장은 평화로워 보였다. 죽음과 삶이 명석히 구분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밥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의 밥은 무참했다. 끼니는 계속 돌아왔고 나는 먹었다. 나는 말없이 먹었다. 경상 해안 쪽에, 백성의 군량을 빼앗은 적의 군량은 쌓여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바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죽어서 더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적은 죽음을 가벼이 어겼고 삶을 가벼이 여겼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적은 죽일 수 있었고 삶을 가벼이 여기는 적도 죽일 수 있었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나, 모든 유효한 조준은 이동과 이동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노을과 화약 연기
바다는 내가 입각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었지만, 바람이 잠든 저녁 무렵의 바다는 몽환과도 같았다.
바다는 전투의 흔적을 신속히 지웠고 함대와 함대가 부딪히던 물목은 늘 아무 일도 없었다. 빛이 태어나고 스러질 뿐, 바다에는 늘 아무 일도 없었다.
생사의 멱통은 적에게나 나에게나 똑같이 좁았다. 그 멱통에서 삶과 죽음은 포개져 있었다. 그것은 식별되지 않았다. 죽음 너머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그 멱통을 드나들 수 있을 터인데, 바다에서 죽음 너머의 삶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옥수수숲의 바람과 시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적은 전투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그러나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보아도 적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서늘한 중심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려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적이 물러가버린 빈 바다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갈 것이었다.